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아편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0px-China_imperialism_cartoon.jpg|width=100%]]}}}|| || 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 르 프티 주르날, 1898[* 앞줄 왼쪽부터 [[영국]],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 제2제국]], [[일본 제국]], 뒤에서 놀라는 사람은 당연히 [[청나라]].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독일제국은 [[빌헬름 2세]],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 청나라는 [[이홍장]]을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달리 프랑스와 일본은 국가를 의인화한 캐릭터인데, 프랑스는 [[마리안(프랑스)|마리안]]을, [[일본 제국]]은 [[사무라이]]를 그렸다.] || 이때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들과 일본은 청나라를 대국, 동양의 잠자는 사자 등의 '침묵의 강자'라는 신비로운 강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괜히 건들지 않으려고 선뜻 선전포고를 걸지 않았으나 아편전쟁 이후 허약한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청은 순식간에 서구 열강[* 영국의 아편전쟁 이후 미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가담해서 청을 조금씩 갈취하기 시작했다.]의 덩치 큰 [[호구(유행어)|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 전쟁 직전에 참전한 [[크림 전쟁]]에서는 두 나라가 무려 40만 대군을 투입해 [[러시아 제국]]을 상대한 데 비해, 이 전쟁에서는 겨우 20분의 1 정도인 2만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청나라의 무릎을 꿇렸다. 얼마나 동서양의 국력 차이가 벌어져 있었고 중국이 동네북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크림전쟁도 러시아의 확장을 막는 전쟁이지 러시아를 무릎꿇린 전쟁은 아니었다. 즉 당시 러시아와 청나라의 수준 차이는 최소 20배 이상이었던 셈이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로도 청은 계속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화 우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청의 조공국이었지만 청의 정보 전달도 늦고 부정확했다. 조선은 청의 관영에서만 제한적인 정보를 받았고 그 마저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조선은 되려 제1차 아편전쟁을 영국이 토벌된 것으로 받아들였고 후에 전라도 지방에 떠밀려온 프랑스 선원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름'이라고 전했는데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베이징이 함락된 제2차 아편전쟁은 당시 조선에도 전해져 적잖이 충격을 안겨 주었지만, 단순히 양이들의 분탕질로 황제가 북쪽으로 잠시 피신한 것으로 해석해 대외관에서 큰 수준의 변화는 없었다. >"양이와 억지로 화친하였지만 외구(外寇)가 점점 치성하여 황가(皇駕)가 북수(北狩)하기에 이르렀으니, 천하가 어지럽지 않다고 이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궐(城闕)·궁부(宮府)·시창(市廠)·여리(閭里)는 편안하기가 옛과 같고, 장병이 교루(郊壘)에 주둔해 있는데 기색(氣色)은 정돈되어 태연하며, 적이 근성(近省)에 숨어 있는데 방어함이 침착하고 여유가 있으니, 이는 민심이 일에 앞서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 조정의 계략도 기한을 주어 군색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철종(조선)|철종]] 13권, 12년(1861년, 3월 27일 첫번째 기사) 하지만 제 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선 사회에서는 곧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와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보따리를 싸들고 산과 계곡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때의 불안한 민심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글인 권학가와 포덕문에서도 드러난다. >요망한 서양의 적이 중국을 범하여 (중략) 서양은 싸워서 승리를 취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서양이 천하를 진멸하니 순망지탄이 아닐 수 없다. >---- >김탁, 북코리아, 조선의 예언 사상 하권 351~352쪽. 반면 [[일본]]의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로부터 매우 정확한 정보를 전달받았다. 이 때 네덜란드는 왜 전쟁이 났는지 상세히 설명하며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경력까지 기록했고, 전투 기록의 경우에도 지휘관의 이름과 병사의 수, 동원된 총기와 선박, 대포의 수량, 전투 장소와 시간, 양상, 피해 모두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 에도 막부에 전달했다.[[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bullpen&id=1963373|#]] 거기에 더해 당시 국왕이던 [[빌럼 2세]]가 직접 아편전쟁의 결과 등 세계정세를 설명하고 개국을 추천하는 친서를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http://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9325444|보내기도 했다.]] 이때는 비록 거절했으나 그로부터 9년 후 [[쿠로후네 사건|미국이 군함을 이끌고 개국을 요구]]해 왔을 때, 막부는 청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서양과 전쟁을 한다는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다만, 막부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별개로 이런 결정은 국내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더욱이 이 과정에서 [[천황]]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막부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약점이 잡혀 결국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메이지 유신]]까지 간간히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을 바탕으로 한 서양인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다행인지 서구 열강은 중국의 이권 획득에 정신이 팔려 이를 빌미로 중국만큼 심한 요구를 하진 않았다고.[* 물론 개항 항구를 늘린다거나 외교공관 수비병을 허용하게 하는 식의 요구를 간간히 했고 막부측에선 [[천황]]이나 개항을 반대하는 측의 반대에도 이를 들어주었다.] 이후 개항을 반대하는 측은 [[사쓰에이 전쟁]]나 [[시모노세키 전쟁]]을 통해 서양의 힘을 제대로 알게 된다. 청은 1차 아편전쟁은 그닥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이때도 최남단이 아니었다. 영국군은 광저우에서 멈추지 않고 북상하여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청제국 물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진강을 움켜쥐었고 이 때문에 청나라가 항복한 것이다.] 청 조정이 심각하게 생각한 건 아편전쟁이 아니라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실제로 아편전쟁 이후에도 중국의 국내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면, 아편전쟁으로 개 털리고 난 후에도 이홍장, 증국번 등의 청의 실권을 장악한 한족 군벌 세력이 양무운동 같은 것이나 하고 전면적 근대화를 시행하지 않아 꽤 오랫동안 무인시험에서 여전히 '말을 타거나 활을 쏘는 기술'을 시험 과목으로 유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2차 아편 전쟁에서는 수적 열세였던 연합군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며 수도 베이징이 함락됐고 자금성에 유니언 잭과 삼색기가 휘날렸으며 원명원이 타버렸다. 2차 아편전쟁부터는 충격이 컸다. 충격을 받고 서구의 것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청과 일본의 근대화 방식의 차이가 나는데, 청은 서구의 조선 기술이나 군사 기술 등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만 받아들이기 시작하지만, 일본은 이런 기술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 체계, 그 기술,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근대식 교육과정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양무운동 조차도 청이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계기인 제2차 아편전쟁 이후다. 물론 일본에서도 이 과정에서 누가 주도권을 갖고 진행하냐에 막부와 막부를 반대하는 측과에 이견이 나눠져 있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보신전쟁]]을 통해 막부를 반대하는 유신 웅번들이 주도권을 잡고 근대화를 진행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를 주도한 유신지사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생겨 [[세이난 전쟁]]까지 가서야 겨우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외세의 적극적 간섭이 없었다는 천운이 있었다.[* 일본 에도막부의 문짝을 걷어찬 장본인인 미국은 남북전쟁, 영국은 세포이 항쟁 진압,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화 등에 열을 냈고 게다가 메인디쉬라 할 수 있는 청을 뜯어 먹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 처음부터 일본에 대한 관심 자체가 청보다 훨씬 적었다.] 이듬해 청은 총리아문을 발족한 뒤 자연스러운 순서로 국제 조약에 관심을 가지고 1864년 마틴에 의해 만국공법(만국율례)이 번역되기에 이르지만, 만국공법 소개 이후 야단법석이라고까지 표현되던 일본과 달리 정작 청은 여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청의 외교 정책은 만국공법을 서양을 견제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등, 일본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불평등 조약 개선에 나섰던 것과 달리 방어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결국, 이 결과가 나타난 것이 바로 [[청일전쟁]](1894)으로, 따지고 보면 청이 '''제대로''' 충격을 받은 것은 아편전쟁 때가 아니라 청일전쟁(1894)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본국과 먼 거리에 위치한 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작으면서도 긴 시간 고립되어 살아왔던, 한낱 관심거리도 안 되었던 섬나라인들의 공세에 처참하게 말렸으니. 게다가 당시 일본군과 청군의 병력비는 '''1 : 3.''' 머릿수로는 이미 청나라가 우세한데다가 전력 자체도 일본군과 맞설 만큼 키운 수준인데도 털린 거다.] 조선은 아편에 찌든 청으로부터 덕을 봤는데 아편 중독으로 건강을 해친 청 사람들 사이에서 이전부터 명약으로 알려져 있던 조선 [[인삼]]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마침 이때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인삼 재배가 성한 이래로 [[홍삼]] 가공이 흥하던 시점이라 18세기 중반 미국 백삼의 청 유입과 일본의 인삼 재배로 적자로 돌아섰던 무역 수지가 크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해와 19세기 후반의 무역 개방으로 얼마 안 가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청을 뜯어먹고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러시아도 이때 영국ㆍ프랑스와 청을 중재하면서 슬금슬금 등쳐먹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편이 퍼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고 중국 전역이 [[마약]] 중독에 시달렸다. 다만 청에 [[아편]]이 급속도로 퍼진 것은 맞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득은 줄어들었다.(다만 1851년경의 아편 수입은 1840년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이유는 이젠 청이 스스로 아편을 제조하기 시작해서. 그리고 청으로의 수출이 막힌 아편은 자연히 영국으로 수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